• 늦게 이룬 화가의 꿈 "작품도 전시회도 무조건 많이"

    신재돈 화가, 호주 하이데 현대미술관에서 초청 개인전 '두 개의 달' 오는 10월 30일까지 열어

    스텔라김(melb stella)

    등록 2022.06.24 12:15수정 2022.06.24 12:18

    호주 멜번 남동쪽 불린(Bulleen) 지역에 1981년 세워진 하이데 현대미술관(Haide Museum of Modern Art)은 보수성향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 동양인 미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메인 전시회장에서 지난 6월 11일부터 재호 한인화가의 초청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호주의 유명 큐레이터인 멜리사 키즈(Melisa Keys)씨가 새 전시회 기획을 하며 빅토리아 주 문화 창작 지원처(Creative Victoria)에 근무하는 정문정(엘리자 정-Eliza Jung) 양과 의논 끝에 멜번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 신재돈 화백의 작품들을 만나게 되어 초청 개인전으로 이어진 것.

    지난 11일 오프닝 행사를 하며 시작된 이 전시회는 오는 10월 30일까지 이어진다. '두 개의 달'(Double Moons)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전시회 장으로 신재돈 화백을 만나러 갔다.

    "마흔 일곱에 호주 이민을 오게 되면서 바로 RMIT 대학교(Royal Melbourne Institute of Technology University) 미대 드로잉과에 입학을 하며 미술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서강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했고 호주에 오기 전까지 직업은 사업가.

    그런데 쉰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미술을 시작한 것이다. '화가가 될까, 작가가 될까' 오랜 시간 꾸었던 그 꿈은, 자신의 고향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항쟁, 군사독재정권 시대 속에 소위 운동권 젊은이가 되면서 접어야 했다.

    힘들었던 투쟁, 오랜 노력 끝에 '민주화'가 찾아왔고, 그때는 꿈보다 생활을 이어가야 해서 사업가로 평범한 삶을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낳고, 그 아들들, 뒤처지지 말라고 다른 사람들이 하듯 유학을 보내고… 그렇게 이어진 호주행이 화가의 길로 이끌 줄을 그때는 물론 몰랐다. 이민도, 새로운 도전도 모두 계획되지 않은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취미처럼 마치 아주 놓치고 싶지는 않은 무엇을 잡고 있는 심정으로 그려 두었던 몇몇 작품을 포트폴리오로 냈는데 입학 허가가 나더라구요.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아들, 딸 뻘 되는 학생들 틈에서 처음에는 그저 옛날 꿈을 다시 찾는 가벼운 기분으로 시작한 공부였다. 하지만 호주 땅에서 풀타임 화가(Full time Artist)가 되는 것이 얼마나 치열해야 하는지를 눈으로 보며 생각을 바꿨다.

    '대충'이라는 것은 없었다. 한국과 호주를 오가며 전시회도 많이 열었다. 뒤늦은 시작, 적지 않은 나이… "많이 하자. 작품도, 전시회도 무조건 많이 하자"는 전략을 세운 신재돈 화백은 그래서 20회 이상의 개인전과 60회 이상의 그룹전을 기록하고 있다.

    분단국가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다른 이념'에 맞섰던 곳에서 떠나왔다. 그리고는 전혀 다른 두 개의 문화와 언어가 주는 장벽을 느끼며 살아가는 조금은 남다른 삶이어서 '두 개의 달'이라는 주제가 태어나게 된 것은 아닐까.

    "두 개의 달… 두 개의 문화… 서로 다른 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문화의 차이? 그러나 또 융합? 간단하지 않죠. 원래 하나인데 둘로 나눠진 것인지, 또는 원래 하나인데 보는 이들이 이분법으로 생각을 하는 것인지… 해답을 내놓기 보다는 그걸 받아들이고 녹여내자는 마음으로 작품을 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호주에서 여러 번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를 했지만 하이데 현대미술관에서의 이번 전시회는 확실히 커다란 한 계단을 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쉽지 않은 기회가 주어졌다는 마음에 신중하게 주제를 설명하고 작품들을 보여줬는데 운이 좋았는지 채택이 되었어요."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진솔하게 표현하는 그의 겸손을 정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반문했다.

    "채택이라고 하셨지만 작품을 인정 받았다는 말이 더 맞지 않을까요?"

    환갑을 넘기고도 몇년이 된 화가는 아주 순하게 웃었다.

    "그런가요? 하기는 다른 문화의 사람이 융합과 이해를 보여줬다는 걸 인정해 준 것일 수도 있겠네요. 진부할 수도 있겠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사회 폐쇄를 겪으며, 세상을 보던 시각은 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으로 바뀌어지더라구요. 그리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새로운 것이 들어왔구요."

    어정쩡한 나이에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허물지 못하는 '남의 나라'에서 '화가'라는 직업을 갖고 사는 삶이 과연 현실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을까?

    "화가의 꿈을 완전히 잠재우고 열심히 매달렸던 사업이 일단 성공적이었구요. 그래서 이번에는 그 돈을 잘 쪼개 쓰면서 화가로의 삶을 살겠다고 생각한 거죠."

    '마음이 행복하다면 그게 최고'라며 씩씩하고 유쾌하게 손잡고 같이 길을 나서준 아내의 덕도 참 컸다. '미술에는 문외한'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아내 서미정씨는 그러나 지금은 신 화백의 표현대로 "가장 필요한 직언을 해 주고 하나에서 열까지 다 도와주는" 전문 매니저가 되어 있다.

    "작업은 즐겁게 합니다. 물론 고통이 슬며시 찾아올 때도 있지만 그 고통을 이겨 낸 기쁨은 더 크니까요."

    그래서 다작이 가능한 것 같다고 말하는 신재돈 화백에게 남은 꿈은 무엇일까.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심포니로 표현을 해 본다면 이제 1악장을 마친 기분입니다. 1악장은 보통 주제를 제시하죠. 지난 10년, 저의 예술세계 구축을 겨우 마친 셈이죠. 이제 다음 악장에서는 변주를 시작해야겠죠? 그 시간을 또 잘 이어가면 미뉴엣의 아름다운 선율에 춤을 출 수 있는 3악장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왜 화가가 될까, 작가가 될까 고민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갈 만큼 놓치고 싶지 않은 표현으로 들려준 삶과 작품 세계 이야기는 아름다운 갤러리 카페의 커피만큼 맛있고 진했다.

    "제가 무슨 마음이었는지 보다 여러분의 눈이 마음에 무엇을 전달해 주는지, 그게 가장 중요한 거죠. 그걸 느끼는 한나절을 가지신다면, 저는 그걸로 많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작품을 하고 그래서 이곳에 어느 한 부분에라도 대한민국 출신 화가의 위상을 심고 싶다는 신재돈 화백의 꿈에 건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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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이달의 예술가-재호한인 작가 신재돈] VIC주 현대 미술 발상지 '하이디 박물관'서 한인 첫 개인전

    신재돈 “Double Moon”

    Published 8 June 2022 2:01pm

    Updated 22 June 2022 8:20am

    By Clara Hwajung Kim

    Source: SBS

    멜버른 현대미술의 발상지인 호주 공립 하이디 박물관이 1981년 개관 이래 최초 한국 작가 개인전을 개최한다. 재호 작가 신재돈의 "Double Moon" 전시는 한인 동포(1.5세대) 큐레이터와의 협업으로도 처음이다.

    유화정 PD (이하 진행자): 호주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재호 작가 신재돈 화백의 ‘DOUBLE MOON (두 개의 달)’ 전시 소식, 6월 11일 전시 개막을 앞두고 신재돈 작가님 모시고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신재돈 작가 (이하 신재돈): 안녕하세요.

    진행자: 재호 작가로 한국과 호주를 잇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오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저희 SBS 한국어 프로그램으로는 처음이시라 청취자 여러분께 간단한 자기소개 먼저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신재돈: 네. 저는 멜번에 살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신재돈입니다. 저는 2007년 당시 47세에 호주 멜번에 와서 늦은 나이에 RMIT University, Fine Art Faculty에 들어가 유화와 드로잉을 공부했습니다.

    멜번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곧바로 작업과 전시에만 전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호주, 한국, 그리고 뉴욕, 방콕 등에서 20여 회의 개인전과 약 60회의 단체전을 하였습니다.

    진행자: 이번에 아주 특별한 소식이 전해져서 저희가 모시게 됐는데요. 호주 공립 하이디 박물관에서 한국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가지게 되셨어요. 먼저 큰 축하드립니다.

    신재돈: 감사합니다.

    진행자: 호주 한인동포사회에도 상당히 고무적인 일인데요. 개인적인 소감을 여쭤봐도 될까요?

    신재돈: 이번에 멜번의 현대미술 발상지라 할 수 있는 하이디 뮤지엄에서 정문정 큐레이터님과 협업으로 개인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로서는 호주에서 처음으로 하는 메이저 뮤지엄 전시라 긴장도 되지만, 그동안 해온 작업을 조금이나마 인정받는 계기인지라 뿌듯하기도 합니다.

    진행자: 전시작품 소개에 앞서 하이디 박물관은 어떤 곳인지, 저희가 어떤 곳으로 이해를 하면 될까요?

    신재돈: 예. 정식 명칭은 Heide Museum of Modern Art인데요. 1981년에 공공 미술관으로 문을 열어서 지금까지 주로 Australian Artist 들을 소개하는 전시들을 열어 왔습니다. 이 전에 일찍이 이곳은 1930년대부터 작가들이 모여서 작업하고 서로 교류하는 작가들의 커뮤니티였고, 멜번 아트 Scene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장소입니다.

    진행자: 그러니까 100년 정도 전통이 있네요.

    신재돈: 네. 굉장히 깊은, 모던 아트에서 굉장히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호주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들 Sidney Nolan, Albert Tucker, Charles Blackman, Mirka Mora 등 많은 작가들이 20세기 중반 이곳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이 뮤지엄에는 다섯 곳의 전시 공간이 있는데요. 제가 전시를 하게 된 프로젝트 갤러리는 주로 유망한 젊은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이미 성공한 예술가들이 아닌 미래의 작가들을 발굴하여 보여주는 성격을 띠고 있는 장소입니다.

    진행자: 아 그래요. 차 세대 작가들을 위한 전시 장소이군요.

    신재돈: 제가 나이가 꽤 들었는데도 예술가로서의 경력으로는 젊은 작가군에 속해 이렇게 소개되는 것 같습니다.

    진행자: 아 그렇습니까. 현대 미술의 계보를 잇는 유서 깊은 하이디 박물관이 신재돈 작가님의 전시를 소개하는 데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신재돈: 제가 소개되는 이유는 아마도 제가 아시안 이민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탐구하는 성격의 작업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호주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는 나라이지만 사회의 주류세력은 여전히 백계 유럽인들입니다. 하이디 뮤지엄 역시 그 주류세력이 세운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미술관이 아시안 이민자들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전시를 통해 적극적인 소개에 나선 것은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진행자: 이번 전시의 타이틀이 ‘DOUBLE MOON (두 개의 달)’인데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는 달은 분명 하나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작가님의 달은 왜 두 개일까요? 제가 너무 직접적인 질문일지는 모르겠지만요.

    신재돈: 이번 전시에 포함된 ‘두 개의 달’이란 작품에서 큐레이터님이 전시 타이틀을 정했습니다. 이 작품은 크기가 세로 2미터, 가로 3.2미터의 거대한 풍경화입니다. 캔버스 거의 전체를 꽉 채운 산이 있고 그 산들 위로 두 개의 달이 떠 있습니다. 그리고 산의 하단부는 여러 가지 원색들이 단풍 혹은 불빛들처럼 반짝이고 있습니다.

    달은 하나인데 두 개가 떠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왜 달이 두 개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하려는 의도 자체가 작품의 성격이기도 합니다.

    사실 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내서 저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출신 국적에 따라 각각 다른 이야기들을 하더군요. 피디님도 아마 제 작품을 직접 보시면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무엇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진행자: 아 그럼 제가 작가님의 의도하신 레이다에 제대로 걸린 거네요. (웃음) 이번 전시에 총 몇 작품이 소개되나요?

    신재돈: 전시되는 작품들은 네 점의 큰 캔버스화, 그리고 한지 위에 그린 여섯 점의 인물들입니다. 각기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아마도 전시되는 작업 전반에 흐르는 이야기가 있다면 두 개의 달이라는 내용일 것입니다.

    진행자: 서양화는 캔버스에 유화 작업이 주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지는 수묵이나 한국화에 주로 쓰이지 않습니까? 한지를 이용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신재돈: 한지는 제가 사용하는 종이들 중에서 페인팅과 드로잉을 동시에 다 가능하게 하는 바탕 재료입니다. 제가 경험한 한지는 서양의 종이들과 비교해서 훨씬 가볍고 동시에 견고해서 쉽게 찢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업실을 떠나 여행 중일 때, 다른 나라나 도시에서 일정기간 임시 거주하며 작업할 때 가지고 다니기가 무척 편리하더군요.

    진행자: 아 그렇겠습니다. 그런데 물감이 번지거나 하지는 않나요?

    신재돈: 수묵화를 하는 작가들은 이 한지의 흡수성을 적절히 이용하고요. 또 빠른 운필로 흡수되는 정도를 조절을 하지요. 그러나 한지 위에아크릴릭화나 유화를 그리기 위해서는캔버스 천에칠하는젯소라는 재료를이용해적절히조정할수있습니다. 저는 젯소를 칠한 한지의 표면, 그 온화함, 적당한 흡수성과 그로 인한 은은한 배색 효과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서양의 재료인 유화나 아크릴릭화를 한지에 계속 실험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지만이 품을 수 있는 회화의 질을 추구하려는 생각도 합니다.

    또한 한지 위 작업은 설치도 비교적 용이해 곧바로 전시를 할 수도 있더군요. 이번 하이디 뮤지엄 전시에도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한지 위의 작업 여섯 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행자: 한지를 이용한 작품들이 호주인들에게 독특한 인상을 줄 것 같아요. 더불어 한지의 우수한 재질을 소개하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작가님, 평소 작품의 영감이나 소재들은 어디에서 찾으세요?

    신재돈: 어.. 많은 작가들이 어떤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리죠.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면서 무작정 기다린다고 영감이 떠오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곤 합니다. 페인팅을 하면서 도저히 완성이 되질 않아 많은 시간을 허비하다, 문득 실패 속에서 어떤 빛줄기를 발견합니다. 다시 말해서 작업의 실패가 주는 괴로움이 역설적이게도 제게는 영감의 원천인 것 같습니다.

    한편 저의 주요 작업이기도 한 드로잉은 저에게 작업이면서 동시에 휴식이기도 합니다. 종이 위에 아무 재료로나 드로잉을 하고 있는 이런 느슨한 상태, 작업의 실패를 예견하는 팽팽한 긴장감, 이건 주로 화가들이 캔버스에 유화를 그릴 때 수시로 경험하는 두려움인데요. 이런 것이 없는 상태를 저는 좋아하는데, 이런 순간은 이성적인 자기 검열 같은 것들이 작동을 멈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문득, 어떤 보이지 않는 감각기관이 열리며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까지는 눈에 보이는 것, 즉 세상을 관찰하며 보이는 것을 그리다가, 팬데믹 이후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무엇인지 모르는 것 등이 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진행자: 굉장히 철학적인 말씀을 주셔서 귀를 기울이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작업이면서 동시 휴식이 된다’ 참 부러운 말씀입니다.

    신재돈: 그게 드로잉의 굉장히 큰 장점인 것 같습니다.

    진행자: 앞서 소개에서 40대 후반(47)의 나이에 이민을 결정하고, 늦깎이로 호주 대학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이후 10여 년간 전문 화가의 길을 걷고 계신데.. 결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질문드려볼게요. 작가님께 ‘그림’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신재돈: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대학을 가려고 준비하다 좌절된 경험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요. 그 이후 예술과는 상관없는 직업세계에 있었습니다.

    멜번에 도착했을 때는 그동안의 삶에 잔뜩 지쳐 있는 상태였고요. 그러다 여기서는 나이 든 사람들이 미술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첫 시작은 그림을 그리며 유유자적 살아보려는 것이었는데요. RMIT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많은 작가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이후 치열한 예술가의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최대한 많은 양의 작업을 하고 또 그만큼 많은 전시를 하자는 것이 유일한 제 삶의 목표였습니다. 그림은 저에게 일종의 지적인 유희입니다.

    진행자: 유희요?

    신재돈: 네. 놀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세계나 역사, 그리고 인간에 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놀이하듯 작업할 수 있는 매체는 그림이나 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가벼운 놀이이지만 동시에 지적 긴장감이 가득한, 그래서 또한 무겁기도 한 그런 예술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진행자: 치열한 예술가의 삶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가슴속에 1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라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명언을 짚어 보게 하는 말씀 같습니다.

    그럼 전시 얘기로 돌아가 볼게요. 이번 전시는 하이디 박물관이 소개하는 첫 한국 작가 전시이자, 한국 작가와 한국 큐레이터와의 협업으로서도 처음이라 더 의미가 크다고 보는데요. 아무래도 두 분이 모국어로 소통이 되니 협업 과정이 훨씬 원활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신재돈: 정문정(Eliza Jung) 큐레이터님은 영어가 퍼스트 랭귀지인 만큼, 제가 미숙한 영어 커뮤니케이션을 여러모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전시 준비 과정에서 하이디 뮤지엄 기획자들과의 대화에서 핵심을 놓치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동시에 정 큐레이터님은 한국어에도 부족함이 없고, 한국과 호주 두 문화현상의 융합에도 깊은 이해가 있어서 전시 주제를 해석하고 확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진행자: 그 부분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네요. 이번 전시가 6월 11일 오프닝부터 10월 30일까지 장장 5개월 간 이어지는데요. 전시기간 중에 작가와의 대화의 시간 등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도 진행된다고요?

    신재돈: 전시가 5개월 가까이 진행되면서 아티스트와 큐레이터의 대화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Jay Song 멜번 대학교 한국학 교수와 큐레이터, 그리고 제가 함께 하는 페널 디스커션이 있고요.

    이런 프로그램은 하이디 뮤지엄을 제이 송 교수님이 관여해 온 멜번 한국인 지식인 그룹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 인디지니어스 음악과 재즈를 연결하며 영적인 음악세계를 펼치고 있는 멜번 거주 한국인 작곡가 Sunny Kim이 초빙되어 제 그림을 배경으로 하여 퍼포먼스를 할 예정입니다.

    진행자: 말씀하신 Jay Song 송지영 교수님은 저희 한국어 프로그램과 이민 관련 여러 번 대담을 나눠주셨고요. 써니킴 교수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공연 인터뷰로 모신 바 있습니다. 다채로운 연계 프로그램들이 이번 전시를 더욱 의미 있게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인터뷰 끝으로 이번 전시 또 앞으로의 작가님의 미술활동에 대해 전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주시죠.

    신재돈: 한국 이민자로서의 내가 바라보는 호주, 그리고 한반도가 제 작품의 제재이기에, 이 전시를 통해 특정 에스닉 그룹의 시야가 호주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하고, 또 저희 한국 커뮤니티에도 작은 활력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신재돈 작가님의 바람처럼 호주와 한국을 잇는 좋은 문화 외교의 역할이 되시리라 봅니다. 이번 전시 성황 이루시길 저도 바라겠습니다.

    신재돈: 감사합니다.

    진행자: 오늘 좋은 시간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진행에 유화정이었습니다.

  • 두 개의 달 아래 예술가

    이승미 (해남 행촌미술관 관장)

    <어머니의 눈물>

    모든 일은 그날 시작되었다.

    세상을 살다보면 예기치 못한 행운을 만나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어려움도 맞이하게 된다.

    대부분 행운과 불행은 짝을 지어 함께 오기도 한다. 사람들은 고난이 인생의 날개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난이 행운과 함께 오기는 무척 어렵다. 고난은 슬픔을 참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 전라남도 신안과 진도를 잇는 바닷길, 병풍도 인근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였다. 이 사고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과 교사, 일반인 승객 총 476명 중 172명만이 구조되었고 295명이 사망했다. 9명은 실종되었다.” 그날 우리는 북방한계선 위 백령도에서 며칠인가를 짙은 안개에 갇혀 있던 중이다. 며칠 만에 짙은 안개를 벗어나 드디어 움직이게 된 청해진 해운 소속 여객선을 타고 인천으로 나오는 4시간 내내 배 안에서 세월호 속보와 속보. 그리고 현장 생중계를 보았다. 그날 이후 4년 동안 추진 중이던 백령도 평화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6월이 시작된 어느 날 몇몇 작가와 나는 팽목항에 가기 위해 15년간 비어 있던 임하도수련원 문을 열고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2014년 4월 16일.

    그날 이후 우리의 발걸음은 백령도에서 임하도로, 북에서 남으로 향하게 되었다.

    신재돈 작가는 호주 멜버른에 살고 있다. 그는 당시 두 해에 걸쳐 일시적으로 백령도에 마련된 레지던시에 머무르며 평화미술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북의 첨예한 대립과 일련의 포격사건의 현장을 답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으로, 광주가 고향인 작가가 이국의 땅에서 살면서 목격한 것은 한국에서 살면서 느끼는 대한민국 내국인의 일상과는 매우 달랐다.

    이국땅에 살다 보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객관적 입장으로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직접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고, 일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고국을 떠나 온 공간적 타자의 마음 한구석의 돌덩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크고 무거워진다.

    본래 인간과 사회 존재에 대해 천착해 온 작가가 고국을 벗어나 있었던 상황이 오히려 대한민국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이 그의 작품에서 더욱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게 한 요인이 되었다.

    남북 분단 80년. 매년 거르지 않고 연례적으로 벌어지는 남북의 정치적 대치상황, 김정일 사망 이후 북의 정권교체. 여전히 전 세계 언론을 뜨겁게 달구는 북의 핵무기 소식. 연평도 포격을 시작으로 미사일 개발과 발사. 이 모든 사건은 오히려 국내에 살고 있는 당사자들 보다 해외교포들에게 더욱 심각하게 느껴지곤 한다.

    신재돈 작가는 한국과 호주를 오가며 우연히 참여한 백령도 프로젝트를 통해 어느 날부터 자연스럽게 남북의 정치적 거리감과 인간적 한계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백령도에서는 북한이 지척이다. 날씨 좋은 날에는 마치 이웃마을처럼 사람들의 움직임이 훤히 보인다. 자전거 타고 가는 군인 망원경으로 나를 보고 있는 북쪽의 군인...

    남도 북도 땅에는 꽃이 피고 푸른 초록이 꽃처럼 피어나는 봄. 4월이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였다. 작가는 김정일 사망으로 연일 보도되는 TV속에서 매우 낯선 장면을 보게 되었다. 우는 사람들. 집단으로 맹렬하게 우는 사람들은 마치 광기어린 종교적 의식처럼 보였다. 한겨울에 추위도 마다않고 우는 사람들. 2014년 겨울, 작가의 구로동 작업실은 작품 ‘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구로동작업실에서 만난 우는 사람들 틈에 백령도의 신화로 남은 부영발신부의 초상과 김정일의 장례행렬도가 있었다. 그리고 우는 사람들로 가득 찬 그림 속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두 개의 달 아래 신재돈 작가가 서있었다.

    2014년 가을 작가가 해남에 잠시 머물게 된 것도 시작은 2014년 4월 16일 그날로부터 비롯되었다. 작가가 2014년 10월 해남 문내면 임하도, 이마도스튜디오에서 머무르며 팽목항을 오가던 즈음, 팽목의 어머니들은 예술가인 그에게 크나큰 큰 영향을 미쳤다. <우는 여자 Weeping Woman>는 진도 바다를 뒤로 하고 울고 있는 여자를 그린 작품이다. 팽목에서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슬픔’을 견디며 울고 있는 어머니의 눈물이다. 이 세상 무엇 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심장을 잃은 대한민국 모든 어머니의 눈물이다. 심장을 잃은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 주는 일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하기 어렵다. 슬픔을 참고 인내하고 노력하는 어머니들을 지켜보는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에 단지 동참할 뿐이다. 신재돈 작가의 <우는 여자 Weeping Woman>의 어머니의 눈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 장의 그림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도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보태는 노력이다. 예수를 잃은 성모의 슬픔을 표현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비롯해 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고전적인 주제이다. 스페인 내전 시 게르니카 참상을 소재로 한 피카소의 <우는 여자>도 그렇다. 작가의 <우는 여자 Weeping Woman>는 그런 관점에서 작가의 예술적 노정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부여받았다.

    Colorful World _삶의 아이러니

    한편으로 팽목항의 슬픔과는 어울리지 않게 남도의 넓은 들과 푸른 하늘 그리고 평온한 바다는 아이러니하게도 작가에게 또 다른 영감으로 다가왔다.

    10월 14일 해남 우수영 5일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시작으로 삶을 지속하는 일상적인 사람들의 모습은 그러한 아이러니를 반영한다. 해남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 중 녹우당의 공재와 거북선식당 주인 최정숙은 신촌역 앞의 고교생이 되고 2021년 시흥대로를 걷는 사람으로 이어진다. 한가롭게 어슬렁거리는 <동네 개>는 이 세계의 아이러니를 반영한다.

    <And Life Goes on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1991년작 다큐멘터리 제목이자, 2003년 이라크전쟁 중 바그다드 현장에 다녀온 박영숙작가의 작품제목이기도 하다. 전쟁 중인 도시 바그다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밤마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 중임에도 새벽이면 사원에 나가 기도하고 우유를 배달하는 배달부도 일을 거르지 않고, 맑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정원에서 신문을 읽는 젊은 지식인의 품위도 유지했다. 바그다드의 젊은 신랑신부들은 결혼했고, 가족들은 매일저녁 화려한 거리의 유명 음식점으로 몰려갔다. 어렵게 바그다드에 간 작가들은 매우 당황스러웠으나 이내 그들의 일상의 희망을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는 깨달음을 담은 작품으로 표현했다. 삶의 아이러니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신재돈작가는 2014년 우수영 5일장에서 역동성을 느낀다. 팽목항의 슬픔이 아니라면 땅끝 해남에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작가는 우수영 5일장에서 퍼덕이는 싱싱한 생선과 형형색색의 원색아래 활기찬 상인들과 거북선식당의 솜씨 좋은 최정숙사장에게서 본능적인 삶의 에너지를 느낀다. 삶의 아이러니는 때로 유쾌함과 행복감 일상의 따뜻함으로 다채롭게 다가온다. 넓은 관엽식물로 즐비한 정원의 원탁에 마주한 심각한 사람들, 영화 주인공처럼 한껏 멋을 부리고 홍대 앞 거리를 서성이는 자신만만한 고등학생, 럭셔리한 안마의자에 앉아 온몸에 힘을 빼고 의자에 몸을 의탁한 배불뚝이 중년남자. 시흥대로를 걷는 선남선녀, 차례를 기다리는 미용실의 젊은 여성, 뉴욕의 지하철 뉴욕커들, 유럽의 쇼윈도우, 유럽과 닮은 듯 다른 멜버른의 아름다운 거리, 화려한 풀장의 사람들... 솜사탕을 든 사람 등등, 우수영과 신도림, 삶의 여행자 혹은 지구의 이방인관찰자인 작가의 일상은 다채롭고 칼라플한 삶의 아이러니로 화폭에 기록된다. 일상의 소소한 나열과 지루함 혹은 격동의 아이러니 그 자체가 삶이다. 하루도 단조롭지 않은 칼라플한 세계이다. 어떻게 그리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사회적 정치적 이방인으로서의 예술가

    작가는 어느 날 주변에서 환기시켜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쫓아 예술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정작 본인은 대한민국의 남자로 성장하느라 어린시절에 칭찬받았던 재능에 대한 기억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뒤 낯선 나라 미술대학에 들어가 조형언어를 익혔다. 대한민국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남자에게는 매우 낯선 모험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예술가의 시각으로 본 분단된 나라. 평범과 상식을 요구하던 나라의 사회적 분위기. 그 덕에 남과 북 하늘에 존재하는 두 개의 달에 대하여 아무런 의구심도 없이 본능적으로 받아들였다.

    80년 광주에서 보낸 청년기로 인해 이국의 평범한 20대와는 확연히 다른 시각을 가진 채 성장했다. 정치와 폭력 자유와 평화 그리고 예술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와 인문을 내면에 담을 수 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어 가족을 이루고 나서야 낯선 땅에서 이방인 관찰자로서 예술가의 삶을 시작했다. 그 점이 작가가 가진 예술적 포지션 혹은 타 예술가들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그는 사회적 정치적 이방인으로서의 예술가인 것이다.

    ‘두 개의 달아래 선 예술가’

    이승미

    (작품사진 우는 여자Weeping Woman 53x53cm acrylic on canvas 2015)

    어머니의 눈물.

    모든 일은 그날 시작되었다.

    세상을 살다보면 예기치 못한 행운을 만나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어려움도 맞이하게 된다.

    대부분 행운과 불행은 짝을 지어 함께 오기도 한다. 사람들은 고난은 인생의 날개라고들 한다. 그러나 고난이 행운과 함께 오기는 무척 어렵고 슬픔을 참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 전라남도 신안과 진도를 잇는 바닷길, 병풍도 인근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였다. 이 사고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과 교사, 일반인 승객 총 476명 중 172명만이 구조되었고 295명이 사망했으며 9명이 실종되었다.” 그날 우리는 북방한계선 위 백령도에서 며칠인가를 짙은 안개에 갇혀 있던 중이다. 며칠 만에 짙은 안개를 벗어나 드디어 움직이게 된 청해진 해운 소속 여객선을 타고 인천으로 나오는 4시간 내내 배 안에서 세월호 속보와 속보. 그리고 현장 생중계를 보았다. 그날 이후 4년 동안 추진 중이던 백령도 평화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6월이 시작된 어느 날 몇몇 작가와 나는 팽목항에 가기 위해 15년간 비어 있던 임하도수련원 문을 열고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2014년 4월 16일.

    그날 이후 우리의 발걸음은 백령도에서 임하도로, 북에서 남으로 향하게 되었다.

    신재돈 작가는 호주 멜버른에 살고 있다. 작가는 당시 두 해에 걸쳐 일시적으로 백령도에 마련된 레지던시에 머무르며 평화미술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북의 첨예한 대립과 일련의 포격사건의 현장을 답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으로, 광주가 고향이고 80년대 학번인 작가가 이국의 땅에서 살면서 목격한 것은 한국에서 살면서 느끼는 대한민국 내국인의 일상과는 매우 달랐다.

    이국땅에 살다 보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더 깊이를 가지고 생각하게 된다.

    직접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고, 일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고국을 떠나 온 공간적 타자의 마음 한구석의 돌덩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크고 무거워진다. 본래 인간과 사회 존재에 대해 천착해 온 작가가 한국 땅을 벗어나 있었던 상황은 오히려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이 그의 작품에서 더욱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게 한 요인이 되었다.

    남북 분단 80년. 연례적으로 벌어지는 남북의 정치적 대치상황, 김정일 사망 이후 북의 정권교체. 매년 전세계 언론을 뜨겁게 달구는 북의 핵무기개발 소식. 연평도 포격을 시작으로 미사일 개발과 발사. 이 모든 사건은 오히려 국내에 살고있는 당사자보다 해외교포들에게 더욱 심각하게 느껴지곤 한다. 신재돈 작가는 한국과 호주를 오가며 우연히 참여한 백령도 프로젝트를 통해 어느 날부터 자연스럽게 남북의 정치적 거리감과 인간적 한계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백령도에서는 북한이 지척이다. 날씨 좋은 날 이웃마을처럼 사람들의 움직임이 훤히 보인다. 자전거 타고 가는 군인 망원경으로 나를 보고 있는 북한군... 북에도 땅에는 꽃이 피고 푸른 초록이 꽃처럼 피어나는 봄 4월이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으로 연일 보도되는 TV속 우는 사람들, 집단의 광기어린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 2014년 겨울, 작가의 구로동 작업실은 작품 ‘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구로동작업실, 우는사람들 사이에 백령도의 신화로 남은 부영발신부의 초상과 김정일의 장례행렬도가 있었다. 그리고 우는사람들로 가득찬 그림 속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2014년 가을 신재돈작가가 해남에 잠시 머물게 된 것도 시작은 2014년 4월 16일 그날로부터 비롯되었다. 신재돈 작가가 2014년 10월 해남 문내면 임하도, 이마도스튜디오에서 머무르며 팽목항을 오가던 즈음, 팽목의 어머니들은 예술가인 그에게 크나큰 큰 영향을 미쳤다. <우는 여자 Weeping Woman>는 진도 바다를 뒤로 하고 울고 있는 여자를 그린 작품이다. 팽목에서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슬픔을 견디며 울고 있는 어머니의 눈물이다. 이 세상 무엇 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심장을 잃은 대한민국 모든 어머니의 눈물이다. 심장을 잃은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 주는 일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하기 어려운 일이다. 슬픔을 참고 인내하고 노력하는 어머니들을 지켜보는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에 단지 동참할 뿐이다. 신재돈 작가의 <우는 여자 Weeping Woman>의 어머니의 눈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 장의 그림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도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보태는 노력이다. 예수를 잃은 성모의 슬픔을 표현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비롯해 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고전적인 주제이다. 스페인 내전 시 게르니카 참상을 소재로 한 피카소의 <우는 여자>도 그렇다.

    <Colorful World 삶의 아이러니>

    한편으로 팽목항의 슬픔과는 어울리지 않게 남도의 넓은 들과 푸른 하늘 그리고 평온한 바다는 아이러니하게도 작가에게 또 다른 영감으로 다가왔다.

    10월 14일 해남 우수영 5일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시작으로 삶을 지속하는 일상적인 사람들의 모습은 그러한 아이러니를 반영한다. 해남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 중 녹우당의 공재와 거북선식당 주인 최정숙은 신촌역 앞의 고교생이 되고 2021년 시흥대로를 걷는 사람으로 이어진다.

    <And Life Goes on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1991년작 다큐멘터리 제목이자, 2003년 이라크전쟁 중 바그다드 현장에 다녀온 박영숙작가의 작품제목이기도 하다. 전쟁 중인 도시 바그다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밤마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 중 임에도 새벽이면 사원에 나가 기도하고 우유를 배달하는 배달부도 일을 거르지 않고, 맑은 아침 햇살에 정원에서 신문을 읽는 젊은 지식인의 품위도 유지했다. 바그다드의 젊은 신랑신부들은 결혼했고, 가족들은 유명 음식점으로 몰려갔다. 작가들은 그들의 일상의 희망을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는 깨달음을 담은 작품으로 표현했다. 삶의 아이러니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신재돈작가는 2014년 우수영 5일장에서 역동성을 느낀다. 팽목항의 슬픔이 아니라면 땅끝 해남에 올 일도 없었겠으나, 어느덧 작가는 우수영 5일장에서 퍼덕이는 싱싱한 생선과 형형색색의 원색아래 활기찬 상인들과 거북선식당의 솜씨 좋은 최정숙사장에게서 본능적인 삶의 에너지를 느낀다. 삶의 아이러니는 때로 유쾌함과 행복감 일상의 따뜻함으로 다채롭게 다가온다.

    영화 주인공처럼 한껏 멋을 부리고 홍대 앞 거리를 서성이는 자신만만한 10대 청소년, 럭셔리한 안마의자에 앉아 온몸에 힘을 빼고 의자에 몸을 의탁한 중년의 남자. 신도림역 이발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젊은 여성, 뉴욕의 지하철 뉴욕커들, 유럽의 쇼윈도우, 유럽과 닮은 듯 다른 멜버른의 아름다운 거리... 우수영과 신도림, 삶의 여행자 혹은 지구의 이방인 작가의 일상은 다채롭고 칼라플한 삶의 아이러니가 화폭에 남는다. 이렇게 일상의 소소한 나열과 지루함 혹은 격동의 아이러니 그 자체가 삶이다. 하루도 단조롭지 않은 칼라플한 세계이다.

    <사회적 정치적 이방인으로서의 예술가>

    작가는 어느 날 주변에서 환기시켜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쫓아 예술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정작 본인은 대한민국의 남자로 성장하느라 어린시절에 칭찬받았던 재능에 대한 기억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뒤 이국의 미술대학에 들어가 조형 언어를 익혔다. 대한민국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남자에게는 매우 낯선 모험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예술가의 시각으로 본 분단된 나라. 평범과 상식을 요구하던 고국의 사회적 분위기. 그 덕에 남과 북 하늘에 존재하는 두 개의 달에 대하여 아무런 의구심도 없이 본능적으로 받아들였다.

    80년 광주에서 보낸 청년기로 인해 이국의 평범한 20대와는 확연히 다른 시각을 가진 채 성장했다. 정치와 폭력 자유와 평화 그리고 예술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와 인문을 내면에 담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 가족을 이루고 나서야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서 예술가의 삶을 시작했다. 그 점이 작가가 가진 예술적 포지션 혹은 타 예술가들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그는 사회적 정치적 이방인으로서의 예술가인 것이다.

    2021.12

  • <한지와 나> 2020년 겨울호

    전양배 (군장대학교 교수)

    신재돈은 1959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47세인 2007년에 호주 멜버른에 이주하여 RMIT 대학교의 미술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늦은 시작에 따른 짧은 경력을 만회하기 위해 작업에만 전념하였는데 그간 호주, 한국 등에서 20여회의 개인전을 하였고, 뉴욕, 베를린, 방콕에서 레지던스에 참여하며 시야를 넓히고 경력을 쌓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써 해외 작품 활동에서 어려운 점은 무엇보다도 소통의 한계라고 한다.

    호주에서 미술대학을 나오고, 호주 교수들이나 동료 작가들과 교류를 갖고는 있지만, 호주사회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그들에 미치지 못하는 한계이다. 이것은 마치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의 한국사회, 역사, 정치에 대한 지적 이해에 도달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다. 그래서 현지 사회에 대한 발언이 어렵고, 그 할당 몫이 적을 수밖에 없다.

    “만약 섣부른 생각을 예술로 표현하면 피상적이어서 유아적 수준이거나 편협되어 잘못된 시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때 호주로 오는 난민의 배가 파선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를 주제로 작업하였다가 크게 후회한 적이 있기도 합니다. 정치적인 올바름 이전에 시야의 좁음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전제조건은 작가로서의 입지에 제한으로 나타나고 주류담론에서 소외되어 이방인 같은 느낌을 스스로 가지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한편 이런 감정 자체가 반영되어 예술적 소재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이 예술 활동이며 이런 과정을 겪고 나서야 좋은 예술을 하게 되는 동력이 된다고 말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한국과 호주를 끊임없이 왕복하며 작업했다. 한국은 호주보다 편하고 익숙해 더 바쁜 편이고 호주에 되돌아오면 만날 사람도 줄어들어 작업에 대한 집중도가 높다 한다.

    “여행이나 이동은 작가를 깨어 있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한곳에 오래 머물면 잘 안보입니다. 호주에 돌아와서 작업할 때 새로운 발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이방인으로 있는 것이 작가로서 장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에서 한반도 정세와 같은 시사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걸 보면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일상생활의 삶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장면들, 즉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에서 주로 작품의 영감을 얻는다. 돌아다니며 직접 경험한 것, 여행지의 광고전단, 신문, 뉴스가 작업의 소스가 되었다. 그에게 있어 잦은 여행과 이것에서 얻어지는 모티브를 이용한 회화작업은 세상을 관찰하고 교감을 나누는 과정이다. 그는 작업에 있어 드로잉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길거리, 전철, 카페, 식당, 쇼핑센터 등 삶의 일상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하는 것 (작은 수첩위에 스케치하거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 눈으로 보고 작업실에 가서 선을 긋거나 점을 찍는 것도 드로잉이기에 작가의 일상은 드로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드로잉은 신재돈 작업의 가장 주요한 요소이자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신재돈은 무언가를 포착해서 마크를 만드는 것이 드로잉이라 생각한다. 이 마크메이킹에서 사람들을 주로 곡선이나 점 같은 것으로 표현하고, 사람을 둘러 싼 혼경은 직선으로 표현한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것들, 즉 인공물들이고 도시나 건축 등 문명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둘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흔적들을 바탕으로 스튜디오 작업을 하는 것이 신재돈의 회화이다. 즉 관철한 무엇인가를 종이 위에 포착한 드로잉과 이의 축적 속에서 발행하는 상상이 결합하여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물건(object)이 회화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신재돈의 드로잉은 정신적(spiritual)인 모든 활동이며, 페인팅은 물질적(physical) 결과물인 것이다.

    신재돈은 서양화를 주로 그리면서도 바탕재로서의 한지의 활용에 대해 실험적인 관심이 많은 작가이다. RMIT 대학 재학시절 드로잉을 전공하면서 종이가 중요한 매체임을 인식하게 된다. 주로 프랑스산 캔손 10미터 롤 페이퍼를 사용하였는데 전 세계 아티스트들이 쓰는 종이로 주 생산지는 프랑스, 이태리, 영국이다.

    신재돈은 린넨캔버스의 유화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려 그림이 차분해지는 경향이 있고 종이 위 작업은 더 자유롭고 더 다이나믹해서 실험성이 강하다고 말한다. 종이 작업에 대한 관심은 그의 첫 전시인 한국 인사동의 고도 갤러리 전시 작품의 절반을 종이 위의 작업을 선보일 정도로 높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여전히 캔버스와 종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한지를 사용하게 된 계기는 인사동인지 아니면 전주인지에서 150x200cm 2,3합 장지를 많이 샀는데, 가볍고 질기며, 서양종이와 달리 흡수성이 강한 특성이 있어 여러 재료를 배합해 사용할 때 좋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알게 되고부터였다. 또 다른 계기는 2012년 뉴욕에서 3개월 머무르며 작업할 때 한국에서 온 서용선 작가로부터 얻은 닥종이를 사용하고 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한지위에 먹과 마커를 사용해 보았는데 매끄럽고 아크릴릭 물감의 착색 느낌이 매우 좋았었다고 한다. 뉴욕에서 시도해 본 닥종이위의 아크릴릭화 작업은 그의 작업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계기가 되어 한국에 가면 항상 한지를 대량으로 사와 호주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는 여행이나 레지던시 중에는 가벼운 일합지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주로 이합지의 장지를 선호한다. 한지가 흡수성이 좋고 가볍고 질긴 특성이 있으나 흡수성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흡수를 막기 위해 캔버스 천에 size(아교나 PVA glue로 표면은 막는 것)를 하거나, 젯소(gesso)를 칠하고 작업한다. 전주 한지 이합지에 젯소를 일회 칠하고 아크릴릭으로 작업하면 아주 적당히 흡수되고 붓도 잘 나가서 이 조건을 좋아한다.

    멜버른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 David Frenny-Mills는 본인의 작업에서 잉크의 흡수 정도와 그로 인한 색의 조화가 중요한데 표백하지 않은 이합지가 자신의 작업에 적합하고 잉크가 뒷면에 배어 나오는 것을 이용 스스로 배채법을 발견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현재 이 두 작가는 전주한지를 함께 공동 구매하고 있다.

    신재돈 작가는 전주의 성일한지에서 한지를 구입한다고 한다. 한지는 이합장지임에도 불구하고 1평방미터에 70g에 불과할 정도로 가볍다. 서양종이가 무거울 뿐만 아니라 구겨짐을 펴기 어렵고 쉽게 찢기는 등 보관 및 보존이 어려운 것에 비하면 구겨져도 펼 수 있고, 얇으면 배접을 할 수 있고, 오염되면 세탁이 가능하고, 수 백년간 보존할 수 있어 작업에 있어 거의 완벽한 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한지가 수묵이나 한국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회화 일반의 그라운드로 가능하리라고 본다.

    오일프라이머로 바탕을 칠할 때 오일이 배어 나오면 장기보존이 어렵고 결국 썩에 되는데 한지에 두터운 유화를 실험했을 때 린시드오일이 뒷면으로 배어 나오지 않았다. 한지의 재질은 견고해서 잘 찢기지 않아 무거운 유화물감을 두텁게 올려도 잘 견뎌 유화나 아크릴릭, 기타 혼합 재료를 한지에 적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개선점으로 10호 정도의 소형 작품에서는 별 이상이 없으나 대형 작품의 경우 자체 하중으로 인해 표고를 해야 하는데 캔버스 고정시 가해지는 장력을 견딜 수 있는 강도를 확보할 수 있다면 린넨캔버스와도 경쟁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한지의 특성을 장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바탕재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크기에 있어서도 작가용 린넨은 대개 210cm x 10m의 롤로 생산되어 대작 제작이 가능한데 이런 점도 개발의 방향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재돈은 “한지의 표면, 온화함, 적당한 흡수성과 그로 인한 은은한 배색효과로 인해, 서양의 재료인 유화나 아크릴릭화를 한지에 계속 실험 해보려 합니다. 이를 통해 한지만이 품을 수 있는 회화의 질을 추구하려는 생각도 합니다. 그리고 효율적인 디스플레이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꾸준히 시도해 보려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신재돈은 지금까지 일종의 리얼리즘 미술을 해왔다. 사물들을 보고 그에 대한 정직한 반응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리얼리즘은 대상을 미화하거나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려는 태도로 추하거나 무서운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세상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생각하기에 작가의 작품도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올해 코로나19 영향으로 7개월 동안 고립되어 현장성을 상실하고 상상에 의존하며 계속 작업하다 보니 디테일이 사라지면서 형태가 단순화되고 있다.

    “치장이나 장식이 사라지면 그림이 공허해지지만, 동시에 단순화는 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시도 끝에 더 밀어붙이며 그림이 점차 추상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형태를 배제하고 절대적인 감정의 깊이만을 표현하는 시도를 해보고 싶습니다.”

    작가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시간’이라 답한다. “인생은 짧고 시간은 끝없이 흘러갑니다. 그 각각의 시간 속에 작품으로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 인간적인 욕망입니다.”

  • **데미언 스미스 & 헬렌 유 공동기획 개인전 ‘타자의 세계’, ACAE(Australasian Cultural Arts Exchange) 갤러리, 멜버른, 호주 (2019.8.10-9.8)

    ‘타자의 세계’

    데미언 스미스

    ‘타자의 세계'는 멜버른에 기반을 둔 화가 신재돈의 작품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전시회이다. 1959년 한국에서 태어난 작가는 2007년 호주로 이주했다. 이 전시회는 지난 10여년 동안 생산된, 뚜렷이 구분되는 일련의 작품군들 속에서 선별된 유화들을 전시하고 있다. 선택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왕성하게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의 작업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신재돈의 작품 주제들은 멜버른의 삶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과 한국에서의 삶의 기억들을 포함하고 있다. 두 지역의 대조는 그의 작업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특히 멜버른의 다문화 환경과 대비되는, 남북한의 분단에 대한 작가의 반응들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타자의 세계’라는 전시 타이틀 착상은, 작가의 많은 그림들에서 보여지는 어떤 심리적인 영역으로부터 온 것이다. 예를 들어 작가가 남과 북, 즉 두 개의 한국 사이의 38선이나 '비무장지대(DMZ)' 너머의 장면을 묘사할 때 드러나는 '타자성'의 암시는, 대비되는 체제 사이의 차이를 강조한다.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바라보는 작가의 관심은 멜버른에서의 삶을 묘사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에는 그가 사는 지역 속에서 작가가 관찰한 카페 장면과 개인 주택 경매의 긴장감 있는 장면들이 포함된다. 신재돈의 대담한 붓놀림과 생동감 넘치는 컬러 선택은 자신과 타자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증폭시키고 있다.

  • '두 도시' 개인전 작가의 글 (2018.12.1-30, 류미재 갤러리, 양평)

    두 도시에서의 작업

    이 전시는 서울과 호주 멜버른, 두 도시에서 작업한 그림들로 이루어졌다. 특별한 주제를 생각지 않았으며, 나를 둘러싼 일상 속에서 작업의 소재를 취하였다. 생활경험 속에서 이루어진 드로잉들을 기반으로 한 유화나 아크릴릭화, 그리고 큰 드로잉 한 점이 전시의 내용물이다.

    호주 멜버른 : 이 그림들은 가벼워야 했고, 둥둥 떠다니는 무의미한 구름이거나, 여름 낮잠을 자다 꾼 꿈이어야 했다. 작가는 발언을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단속하며 작업의 조형적 완결성만을 추구하려 했다. 형태를 단순화하고 극도로 과장된 원색들을 사용하였다. 그러다 보니 붉은색이 작업 전반을 압도하고 있었다. 심지어 보색인 녹색조차도 붉은색을 더 도드라지게 보이려고 사용한 것 같다. 눈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이 붉은 색이 작업자의 심리,예술충동을 반영하고 있기에 되돌리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특정 색의 노출이 작가의 발언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한국 서울 : 작업장 주변 구로동의 일상풍경을 그려나간다. 내 그림을 정치미술이라고 스스로 주장하지만, 딱히 어떤 정치적 주장도 없는 그런 작업을 지향하고 있다. 더욱이 이것들은 역사,정치와 아무 연관이 없는 생활 속 모습들이다.

    뭔가 긴장감이 느껴지지만 – 이를 위해 작가는 비밀스런 장치를 그림 속에 배치한다- 그러나 파 내려가 보면 아무 것도 없는 빈 우물같은 그런 허망한 그림들을 그리고 싶었다.

    기획은 있는데 타협하면서, 혹은 새로 발견된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작업은 오리무중으로 빠져 들어간다. 결국은 첫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까마득하고 다른 기슭에서 서성이며 들떠 있거나 절망한다. 그러나 이 방랑벽(Wonderlust)이 예술 작업의 피할 수 없는 과정이며 근원적인 매력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기획은 매번 실패한다.

    그리고 나는 낯선 세계에 도달하여 두리번거린다.

    2018.11.29

    신 재 돈

  • *개인전 ‘두개의 달’ (블랙캣 갤러리, 멜번 2017.8.24-9.12/ 소소미술관, 화순 2017.10.1-31)

    두개의 달: 두 현실의 파열과 통합

    David Freney-Mills (Artist & Writer, Melbourne, Australia / 2017)

    신재돈의 전시회 '두개의 달'에는 무대 위의 배우와 같은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전후 한국에서 자라온 작가의 과거 경험과 한국과 호주를 오가며 살고 있는 현재의 삶 사이의 긴장감과 대비를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그의 아버지 세대가 겪은 한국전쟁의 동족상잔 경험은 작가가 자라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980년 광주학살 때 그의 가족은 그 도시에 있었는데, 이 사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신재돈은 등장인물들을 선택한다. 동시에 그 인물들은 작가가 관찰하는 동시대의 세계와 융합되어 있다. 작품 속의 색과 선은 작가가 기억들을 떠올리는 매개체이자 여과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그는 과거와 현재가 대비됨과 동시에 또한 연속성을 띄고 있다는 것을 고찰하고 있다.

    작품의 형상 이면에 숨어있는 몇몇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물에 강한 개별적 특성이나 감정적 표정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특징이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인물들이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지, 예술가에 의해 미리 설정된 감정이 아닌, 우리 자신의 느낌을 더 탐구하게 한다고 생각된다. 그 형상들은 일종의 ‘원형’들인데, 신재돈 작가의 여러 다른 양상을 띠는 자아로부터 배어 나온 것이다. 그의 자아는 한국의 격동적인 과거와 현재의 주요시기와 밀접히 뒤얽혀 있다. 작가가 과거를 주제로 작업할 때 갈색조의 무채색을 사용할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신재돈 작가와 한국역사의 관계는 역동적인 것이어서, 그는 매우 높은 채도의 색채들을 선택해 이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인물들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데, 마치 밤에 밝게 빛나는 네온사인처럼 보인다. 이 인물들은 작가의 과거로부터 떠오른 것이다. 이들은 선과 형태들의 합성물인데, 테크놀로지 주도의 세상에서 영감을 얻은 디지털화된 모습들이다.

    ‘젊은 전사 로서의 자화상’이라는 그림에서, 장대를 들고 있는 한 청년은 한국의 사회갈등 시기에 뿌리를 둔 거리 시위자를 연상시킨다. 신재돈 작가의 청년시절, 학생운동은 군사정권에 대항해 투쟁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작가의 가족은 1980년 광주학살의 목격자들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신재돈 작가 작품의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는 어떤 특정한 사건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와 동료들은 국가 폭력과 거리에서 이 국가 폭력에 대항했을 때의 공포를 체험했다. 작가의 응답은 이런 체험에서 온 트라우마와 상처에 대한 주관적인 소생법인 것이다. 따라서 신재돈의 예술은 카타르시스의 행위이며, 그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인물들을 전형적인 대리인들로 사용한다. 그의 작업은 한편으로는 역사의 교훈을 생각케 하는 동시에 심리적 정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신재돈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더 이상 활동가가 아니다. 나는 그 저항의 나날로부터 떠나 온 예술가이다. 나는 우리가 더 이상 전사가 아니며 전쟁은 끝났다고 말하고 싶었다." 신재돈 작가는 한국 역사에 대한 한쪽의 견해를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 과거 80년대 군부정권에 맞서 싸웠던 전직 운동가들 중 일부는 이제 권력을 가지고 있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종종 그러하듯 그들 중 일부는 부패했다. 그 권력자들의 논리로 사용되는 정치적 메시지를 작가는 선전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랜 세월 많은 예술가와 시인들처럼 달을 주제로 삼았지만, 그는 그만의 창의적인 시각으로 만들어낸 두개의 달의 이미지로, 한편으론 두 개의 한국이 있다는 객관적 현실과,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내면의 주관적 삶을 표현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정치와 미학을 융합했다. 그의 대형 풍경화 속에 두개의 달이 침묵 속에 떠 있는 사실은 두 개의 현실에 대한 상징이다. 비록 두 개로 맞댄 캔버스에 산악과 하늘의 공통된 바탕이 있지만, 그 산과 하늘도 가늘지만 분명한 경계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세계는 매우 유사하다. 그의 다른 작품 들에서 보이는 거리 시위대와 무장한 군인들을 연상시키는 여러 칼러들이, 어두운 산악의 하단부 전체에서, 맥박이 뛰듯 빛나고 있다. 밤은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그의 그림 중 하나에서, 웅크리고 앉아 땅을 파헤치는 인물처럼, 두개의 달은 지표면으로부터 멀지 않은 기억의 풍경들을 침묵 속에서 드러낸다. 신재돈 작가는 격동하는 한국의 뿌리를, 그리고 두 개의 현실로 분리된 과거와 현재의 풍경을 시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 개인전 ‘두 개의 달’ (24 Aug.-12 Sept. 2017 BlackCat Gallery, Melbourne & 1 Oct. - 31 Oct. 2017, 소소미술관(전남 화순))

    신재돈의 전시 제목,“두개의 달”로부터 일차적으로 연상되는 것은, 그의 그림에서처럼 서로 다른 존재로 떠 있는 두개의 달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결코 달은 두 개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조금 더 깊이 작가의 심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두개의 달’의 이미지는 같은 사물의 상반된 해석을 암시하거나, 결코 두 개의 존재일 수 없으나 두 개로 보이는 분열된 존재로서의 작가 혹은 작가를 둘러싼 세상 등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작가는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떠 올라 주변을 배회하는 도플갱어(Doppleganger)로서의 자신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개의 달이 떠 있는 거대한 산 풍경의 그림(‘두개의 달’)은 작가의 세계, 가상 공간으로서의 한반도이다. 그리고 ‘야간 전투’라 이름 붙인 일련의 그의 작업들은 구체적인 인체 형상들이 등장하는 십여 점의 좀 더 작은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다. ‘야간 전투’라 함은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어려운 밤 사이에 벌이는 군사들 간의 전투를 일컫는 말로, 대개의 경우 산악지대에서 벌어진다. 그들은 오로지 희미한 달빛만이 비추는 캄캄한 산 중에 있다. 서로를 알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그들은 이마에 띠를 두르고 무등을 타거나, 막대기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거나, 상대방 군인과 싸우고 있고, 또 여러 젊은 학생들은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들은 결의에 차 있으나 확신이 없으며 때론 겁에 질려 있다.

    그들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으나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검은 밤의 배경은 방향과 공간, 그리고 시간조차 지워버리고 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부유하는 존재들이며 누군가와 싸우거나 싸우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비록 몇몇 정치적인 사건을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작가는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 사건을 빌려 말하고 있진 않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는 작가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단지 1950년대 이후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힘겹게 살아 온 동시대인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두개의 달’은 그것이 상징하는 구체적인 대상물이 아니라 작가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하는데 사용된 하나의 상징 도구이다. 위에 언급했듯이 분열된 자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작가의 심리 속에서 달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계를 비추어 보는 거울과도 같다. 두 개의 달은 두 개의 거울에 비친 두 개의 세상이며 작가의 두 자화상이라고 읽혀진다. 이것은 세상의 이 편과 저 편(남한과 북한, 우리와 그들), 옳고 그름, 삶과 죽음, 끊임 없는 생성과 소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드러난 것과 숨어 있는 것 등을 암시하는데, 무엇이 작가의 시각을 분열시키고 교란하는 지는 분명치 않다. 신재돈 작가가 언급하듯이 그는 한국의 근대 역사를 예술적 제재로 삼고 있다. 그가 직접 경험하거나 스쳐 지나 온 70, 80년대의 남한의 역사, 그리고 그의 아버지 세대가 겪은 일본 식민지 하의 삶, 해방과 분단, 그리고 비극적 전쟁 등이 그의 예술 작업 바탕에 항상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적 트라우마로 인해 강요된 분열된 자아, 이것은 현재 남북 한반도 사람들의 비극적 모습이며, 작가는 한반도의 이러한 정치.사회적 상황을 일종의 폭력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작가는 적과 아를 구분할 수 없는 야간전투를 통해, 보는 시각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되는 역사, 선과 악으로 편을 가르는 진영론, 우리 한국인 모두의 심리 속에 깊이 내재하는 이분법적 사고에 대해 비판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예술 작업을 하게 되는 나의 기본 충동 중 하나는 ‘누군가와의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이다. 그 누군가는 지금 전시를 보러 오는 동시대인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작가도 알 수 없는 미래의 인류가 더 많으리라 생각한다.

    공재는 삼백년 후의 세상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작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리란 상상을 했을까? 공재와 삼백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현재의 예술가가 대화를 시도하는 이런 설정은 가슴이 뭉클하고 짜릿한 경험이다.

    이번 작업은 해남을 오가며 맺어지고 있는 공재와의 인연을 주제로 한 것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항상 십여 명 이상의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작업한다고 느끼는데, 그 중 대부분은 서양 현대 작가들이다. 그런데 주변의 서양 예술가들을 보면 17세기의 렘브란트의 영향을 아직도 꼽는 이들이 있다.

    공재의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서 전통과 현대, 그 사이를 흐르는 역사 등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오랜 세월 전승되어온 공재의 예술세계를 기웃거리고 싶다. 거기에 발을 디뎌보고 싶다. 공재를 공부하고 싶다. 공재를 이해하고 싶고, 공재로부터 배우고 싶다.

    공재를 아끼고 보존해 온 해남 윤씨 녹우당 당주 어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나는 공재의 영향을 받고 싶다. 공재의 영향을 받은 한국 출신 예술가가 되고 싶다.

    2016.10.31

    신재돈

  • 신재돈은 1959년 한국에서 태어나 2007년 호주로 이주하였다. 호주 멜버른 RMIT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후 서울과 멜버른을 중심으로 꾸준한 작업과 전시를 하고 있다.

    작가의 주 작업은 구상회화이며, 주 관심 대상은 인간이다. 이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관심, 즉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을 온 몸으로 체험하며 함께 했던 작가는 사회운동과 예술 작업이라는 표현 방법만 달라졌을 뿐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장구하게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한 찰나를 사는 한없이 작고 무기력한 인간, 그리고 좁게는 한 나라의 정치/사회적인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그러나 묵묵히 인내하며 살아가고 있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강한 연민이 작가를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

    Contemporary Life

    작가의 작품을 내용상으로 구분해 본다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현대 어느 도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익명의 무표정한 사람들로부터, 어느 절의 스님이나 지방 소도시 선술집의 여주인, 카페 여종업원 혹은 아파트 테라스에 나와 일광욕을 하고 있는 중년 여성등과 같은 우리 주변의 구체적인 인물들까지 다양하다. 작가의 작품속에 나타난 바쁜 일상을 사는 평범한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고립되고 외로운 존재인 현대인의 쓸쓸함을 느낀다. 그런데 이 쓸쓸함은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와 강하게 대비되고 있다. 이들은 서울이나 멜버른, 그리고 뉴욕이나 베를린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Recent Historical References

    작가가 천착하는 또 다른 작업은 한국의 정치.사회적인 사건을 기억의 저 편에서 불러내어 그 사건들 속의 사람들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제는 모두에게 잊혀진 1960년대의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나 2011년 12월의 김정일의 장례식, 불과 1년전의 세월호 침몰 사건까지, 한국 현대사의 남/북한을 넘나든다. 이 작업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실상 위에 언급된 일상생활의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인 것이다. 단지 그 때 그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정치.사회적인 사건에 휘말리고 역사의 희생양이 된 것일 뿐이다. 작가의 작업은 그들에 대한 연민과 애도의 한 작은 표현이며, 때로는 엄혹한 역사 속을 살아간 이름 없는 사람들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부류의 작품들로 인해 신재돈 작가의 작업은 때로는 정치 예술로 규정될 수도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삶에 녹아든 정치 즉 일상의 정치(politics in everyday life)가 형상화 된 것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정치적인 사건이나 이슈에 대해 작가 개인의 정치적인 견해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닌, 어떤 특정한 사건에 의해 삶이 왜곡된 사람들에 대한 동질감, 그들의 처지에 대한 연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이 언제라도 그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Classical Historical References

    끝으로 최근 2-3년에 걸쳐 작가가 해 온 일련의 작업군에는 공재 윤두서와 겸재 정선에 관한 것들이 있다. 이들은 다른 두 작업 군과 시각적으로나 주제면에서 매우 다르게 구별되어 언뜻 보면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공재와 겸재의 작품 세계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 본다면, 신재돈 작가의 세 작품 군들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재와 겸재는 18세기 조선 후기에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라는 새로운 회화의 큰 흐름을 시작한 한국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겸재는, 당시 관념적인 풍경을 표현했던 전통적인 풍경화와는 달리, 실제로 존재하는 그것도 중국의 산수가 아닌 조선의 산수를 그렸다는 점에서 조선산수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공재는 최초로 풍속화를 창조, ‘나물 캐는 여인’을 비롯해 ‘짚신 삼기’ ‘목기 깎기’ 등 주로 노동하는 인간들을 그림의 소재로 삼아, 비록 그 자신은 사대부 집안 출신이지만 농민과 서민 특히 노동하는 하층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냈다.

    이와 같이 겸재와 공재 모두 기존의 사고, 관념, 인식을 거부하고 탈피하고자 했으며, 이는 신재돈 작가가 배우고, 잇고 싶어하는 예술철학이기도 하다. 특히 공재로부터 시작되는 풍속화의 전통을 찾아 그 맥을 잇는 일은, 작가 내면에 체화되어 있는 한국미술 전통의 암묵지(Tacit Knowledge)를 발견해내는, 일종의 뿌리찾기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주제로 작업을 하든 신재돈 작가에게 있어 작업은 세상과 소통하는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작업을 통해 현재는 물론 과거, 그리고 어느 미래 그 작품들을 대면할 사람들에게도 끊임없이 말을 걸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서로에게 최소한의 연민이나 애정은 있는가라고.

    2016.9.2

    Anakie West (Writer, Australia)

  • 2015 풍류남도 Art Project '풍류남도 만화방창' (2015.7.30-9.30)

    1.

    해남은 멀고도 멀었다.

    . 서울에서 차로 대여섯 시간, 그러나 마음 속 해남은 땅끝이었다.

    땅끝에 간다는 생각은 마음의 준비를 다부지게 만든다. 왜냐하면 땅끝은 마치 ‘세상 끝’과 같은 상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끝에 고즈넉히 앉아 있을 해남은 먼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 가는 길처럼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해남이 먼 진짜 이유는 그곳이 고립된 남도의 땅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해남에 와서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는 이 지역이 마한의 54개 소국에도, 변한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백제에 통합된 후에도 부여로부터는 여전히 먼, 즉 중앙으로부터의 통제가 먼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풍요로운 바다와 갯벌, 그리고 낮은 구릉으로 연결된 비옥한 농토는 풍부한 생산으로 이 지역 삶의 질을 높였을 것이다.

    해남과 인근 강진, 진도는 더불어서 이 나라의 땅끝이며, 정쟁의 희생자 혹은 패배자가 귀양살이, 낙향을 하던 곳이다. 지금도 강진 백련사 뒷산에는 중앙 정객이 은거하고 있지 않은가. 그 이름이 바다남쪽('해남')이지 남쪽바다('남해')가 아닌것도 중앙 원심력으로부터 힘이 닿지 못하는 '세상 끝' 같은 느낌을 준다.

    해남을 오가기 전에는 서해 5도의 끝 섬인 백령도를 몇 번 다녀왔다. 백령도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북녁땅 장산곶은 또 다른 의미로, 멀리, 깊숙한 경계에로 바짝 다가선 듯한 긴장감과 함께 서늘한 우리 역사의 현장에 들어선 숭고함이 있었다. 백령도와 마찬가지로 해남땅도 이승미 선생과의 만남으로 들어섰다.

    2.

    임하도에 자리잡은 작업장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밥 때가 되면 우수영으로 나가 밥을 먹었다. 싼 가격에 상 가득 차려 내오는 해산물, 젓갈, 채소, 나물, 국에 밥도 먹고 술도 마신다. 그리고 어슬렁거리며 5일장터를 기웃거린다. 검은 고무줄 한 타래를 5미터 정도 땅 바닥에 길게 늘어놓고 파는 노인에게서 고무줄 두 가락을 산다.

    "그건 뭐하러 사요?"

    집사람이 핀잔이다.

    "국민학교때 여자애들이 이런 고무줄로 놀이를 했는데... 당신은 안해봤나?"

    "고무줄 놀이 하자구요?"

    "아니면... 팬티 고무줄로 쓰든지..."

    저녁식사를 하러 다시 우수영 거북선 포장마차에 들렀다. 점심 때와 다름없이, 단골인듯 싶은 아저씨들이 혼자 혹은 둘, 서넛이 여러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다. 이 밥집 최정숙 사장이 경상도 하동 어디에선가 온 분이라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던 우리에겐 다소간 의외의 풍경이었다. 경상도 아주머니가 차려낸 밥상이 전라도 아저씨들에게 인기 절정인 것이다. 주방일을 돕는 분이 있다지만 그래도 음식 맛이라면 경상도와 전라도의 차이가 크다는 것이 통념 아니던가? 잠깐 들은 이야기를 통해, 젊어서 전라도에 와서 이만큼 자리 잡기까지 겪은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최정숙 사장이 칠천원짜리 밥상 옆에 앉아 반찬으로 내 온 노가리포를 손으로 잘게 찢어 준다. 내가 임하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하니

    "화가라기 보다 연예인 포스가 풍기는데요."

    "해남에 정착하기까지 몇 고장을 거치며 많은 사람들을 보며, 사람 보는 법을 좀 알게 되었는데요... 두 분은 정말 딱 맞는 분끼리 만났어요."

    하는 등, 립 서비스로 적당히 간을 맞춘다.

    조기찌개는 옆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다. 최사장 등 뒤로 식당 방 벽지가 꽃으로 가득하다. 매화, 앵두꽃, 벚꽃 같은 것들이다.

    이승미 선생이 일하고 있는 해남병원 내 행촌미술관에 가니 강진 백련사에 가자고 한다. 지역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가 예정보다 길어지는 이선생을 뒤로 하고, 우리가 먼저 도착해 경내를 다 구경하고 나니 이선생이 도착해 일담 스님을 만나러 갔다. 경내는 요즘 국민복이 되다시피 한 등산복을 입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신심 깊은 보살들은 넓은 방에 모여 연등 만드는데 한창이다. '부처님 오신 날' 준비로 분주한 절의 모습이었다.

    일담 스님은 바다와 섬 그리고 절 앞을 가린 산을 배경으로 역광을 받으며 앉아 차를 만든다. 스님 어깨너머 처마에 달린 풍경이 외롭다.

    "절 문을 걸어 잠그고 싶어요."

    지자체와 함께하는 문화행사, 끝없이 밀려들어 사진을 찍는 관광객, 절의 살림경영 등에 몹시 지친 모습이다.

    "누구는 중이 되어 공부하고 싶지 않겠어요?"

    공부하는 스님들을 위해 절집 유지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하는 사판스님들의 고뇌가 묻어나온다. 차를 따르기 위해 소매자락을 걷어 올리는 스님의 손과 복잡한 표정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성과 속을 가르며 지나간다. 법복은 크고 소매도 넓어 스님이 법복안으로 들어가 잠기는 상상을 한다. 스님과 함께 차를 쪄서 뭉친 '차떡'을 말리는 방을 구경하고, 연등 만드는 방도 둘러 보았다.

    3.

    나는 예술작업을 통해 두 가지 사회적 역할을 하고자 한다.

    첫째는 '이야기를 거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이다. 이것은 '대화를 요청'하는 것이고, 예술가의 주위를 둘러 싼 여러 계급, 계층의 사람들과의 연대의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통적인 유화 혹은 아크릴릭 등 페인팅 미디엄으로 그리고자 한다. 이것은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페인팅, 같은 시대의 우리나라 풍속화의 정신과 같다.

    둘째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이다. 그러나 적나라한 저항이나 계몽 같은 주제로 예술가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싶지는 않다. 나는 정치예술의 가능성을 "세상사의 모호성, 어울리지 않는 모순된 사물의 병치, 완성되지 않는 몸짓, 불확실한 결말"* 같은 것에서 찾는다. 오직 정치적 선언으로 출발하는 예술을 경계하고,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 묻어있는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해남에서 스치듯 만난 두 사람을 주제로 작업하며, 나는 해남땅과 최정숙 사장과 일담 스님과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속삭인다. 그리고 연결되고 이어지고 어우러진 우리 삶의 통시성을 "꽃"이라는 메타포로 연결해 보았다. (끝)

    * Guldemond, J. (2015) "More Sweetly Play the Dance" William Kentridge-More Sweetly Play the Dance. (p.8). Belgium: EYE Filmmuseum

  • 개인전 'December, 2011' (7-23 March 2014, 소밥갤러리, 양평)

    우는 사람들

    2011년 12월, 김정일의 장례에 참여하는 평양 시민들의 모습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눈 내리는 평양 거리에서 처절하게 울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낯설어서 사실이라고 믿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오랫동안 폐쇄된 정치 체제가 만들어 낸, 마치 거대한 연극 무대처럼 보였다.

    2013년 12월, 서울에서 ‘김정일의 장례식’을 소재로 작업하면서 나는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된 사진들을 반복해서 보고 또 보았다.

    관찰을 거듭할수록 가슴속은 먹먹해지고 답답해졌다. 이들은 진짜 우는 것이다. 진짜 슬픈 것이다.

    진짜 하늘이 무너진 슬픔을 앞 뒤 안 가리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작업 진행 중에 끝없는 질문들이 떠오르고 또 사라지곤 했다. 그 질문들은 꼭 북한 사람들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반도 전체에 사는 남북 민중들, 남북 정치인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운명에 관한 무거운 상념 같은 것들이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Gerhard Richter)는 1988년에 ’18 October, 1977’이라는 타이틀로 열 다섯 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The Baader Meinhof Group’이라는 좌익 이상주의자 조직원 3인의 죽음을 다룬 것이다.

    한편, 서용선은 2013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열린 ‘기억, 재현, 서용선과 6.25’전에서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일세기에 걸친 우리 역사를 장중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리히터가 10년 전의 근거리 역사를 그림으로써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역사화 (History Painting)를 복원시켰다면, 서용선은 한반도의 비극적 근.현대사를 자신과 동시대인들의 체험 속에서 재구성하여 서술적으로 묘사하면서 한국 역사화의 전당에 기념비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불과 2년 전 한반도에서 발생한 사건을 역사화의 범주로 생각하며 작업했으며, 이는 리히터와 서용선의 역사화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는 역사에 대해, 특히 진행중인 동시대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했으며, 이것이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역사화의 한 기능을 담당 하길 기대한다.

    질문들은 현재와 미래의 관람자들의 마음 속에 여러 형태로 떠오를 것이며, 이는 역사와 그 속을 숙명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에 관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2014년 3월 신재돈

  • 개인전 '사람 그리기 (2013.3.13-19 & 15-29, 고도 & 상명대 스페이스 제로 갤러리)

    나는 사람 그리기를 좋아한다

    1. 나는 ‘사람 그리기’를 좋아한다. 스스로를 역사와 사회 속에 정립해 있는 정치적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지나치게 시대정신과 동떨어진 작업을 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아성찰적이거나 인간의 실존문제를 다루는 주제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다.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해당 시대의 정치,경제, 사회적 배경과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주요한 제재는 항상 그러한 환경 속을 숙명적으로 걸어가는 사람에 맞추어져 있는 듯하다.

    그런데 지난 겨울 뉴욕에서 작업하는 동안 느닷없이 풍경을 몇 점 그리게 되었고 그 풍경들을 뉴욕에서의 전시에메인 이미지로 사용했다. 사람들은 내 풍경그림들을 아주 좋아했다. 풍경을 그리면서 나름대로 자연만이 아닌 인공적인 것, 즉 man-made 기재들을 배치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 과정에서 풍경이 인간들의 역사와 사회를이루어가는 원리와 많이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 날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은 영토, 부동산, 관광자원의한 부분이며, 전적으로 국가나 개인의 소유권과 관련이 되어 있다. 이것은 긴 인간의 역사 과정에서 관통되어 온 점이며, 모든 자연 풍경은 인간들의 소유와 투쟁, 전쟁의 역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2. 사람들은 내가 사람을 그리면 싫어하고 풍경을 그리면 좋아한다. 내가 풍경을 그린다 해도 그것은 사실 사람 그리는 원리와 똑같은데 말이다.

    이번 전시는 풍경이 포함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사람의 모습들이다. 때로는 거울 속의 나의 모습이며, 스마트폰으로 슬쩍슬쩍 사진을 찍는 나를 의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뉴욕 지하철의 흑인 여자의 모습이며, 그리고 신문과 인터넷에 떠돌다 우연히 내 눈길을 사로잡은 이미지들이다. 어떤 것이 되었든 이들은 내 일상생활의 반경 속에서 포착된 모습들인 것이다.

    3. 나는 일상의 평범한 장면을 소스로 하여 일단 작업을 시작하지만, 종료된 그림들은 실생활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나는 내 멋대로 이미지를 잘라내고, 생략하고, 때론 과장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 나가는 과정 속에서 일어난 우연들을 그대로 살려 두기도 하면서 내 의도대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나간다. 내가 만약 신문 편집국에서 일한다면 위험할 것이다. 아니 이런 작업이 용인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 그리기’는 내겐 대단히 매력적인 작업이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시인들처럼 메타포를 사용할 수 있다.

    즉 은유와 상징체계를 이용해 매우 독특하며 내 의도에 맞는 이미지 메이킹을 할 수가 있다. 또한 소설가들처럼 이야기(story telling)를 늘어놓을 수도 있다. 거대서사나 거대담론의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러면서도 발판이 일상생활의 구체적 현실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관념의 유희로 빠질 위험성은 덜하다.

    또한 나에게 있어서 이 ‘그림 그리기’는 모든 작업 형태를 다 포괄한다. 페인팅이건, 드로잉이건, 조각이건, 설치이건,혹은 사진이건 즉 어떤 예술형태이건 간에 나에겐 같은 의미로서의 ‘그리는’ 행위이다. 재료나 작업 방법의 선택에있어서 나는 스스로 그 어떠한 제한도 두고 싶지 않다.

    예술가로서의 그리는 작업은 충분히 즐기고 놀만한 것이다. 언어보다 (쓰기), 논쟁보다(말하기), 그리는 것은 내게 철학적,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상상력을 훨씬 더 증폭시킨다.

    더욱 더 좋은 것은, 그림은 명확하고 논리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글쓰는 사람들은 그래야만 한다. 명료하지 않고 앞뒤가 맞지 않는 글들을 읽기는 도대체 얼마나 피곤하고 신경질 나는 일인가. 그러나 아티스트들은 애매모호하고 모순되는 질문도 일단 던지고 볼 수 있다.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아티스트들의 앞뒤가 안맞고 뒤죽박죽인 작업을보고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다. 아티스트들에게 사람들은 애당초 논리적, 실증적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아티스트들에게 바라는 것은 위대한 상상력이며, 현실을 뛰어넘는 미래의 이미지들이다. 우리 사회처럼사회.역사적으로 옳고 그름을 구분 짓는 이분법적(dichotomic) 논리가 횡행하는 곳에서 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위력적인 것인가 말이다.

    - 작업 노트 중에서 -

  • 신재돈 개인전 ‘사람 그리기’를 기획하며 (2013.3.13-19)

    갤러리 고도 대표 김순협

    화가 신재돈을 대면하면 독일 낭만주의 작가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lich)의 작품“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에 그려진, 누구의 발길도 허락하지 않았을 것 같은 산 정상에서 조각난 바위에 발을 딛고 끝없이 펼쳐지는 안개 속에 시선을 두고 홀로 서 있는 중년신사가 생각난다.

    그러나 신재돈의 시선은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과 대면한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정치인, 평양의 군인들과 탈북자들, 기억들, 요양원 사람들, 전쟁의 포로들, 거리에서 만난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 멜버른 사람들과 한국인 그리고 최근 그가 거주했던 미국의 뉴욕커들까지 빠짐없이 기록하고 기록한다. 모호한 사건들 때로는 덮어버리고 싶은 이야기들, 가식과 부조리와 상처, 삶의 모순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려질 대상이 결정되면 빠르고 굵은 선으로 종이 위든 캔버스 천이든 상관없이 형태를 잡아나간다. 타고난 소묘력이 이 작가의 남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이 대상은 채색을 통해 생기가 부여된다. 빠르게 칠해지는 거친 원색은 화면위에서 색채간의 겹침과 섞임과 뿌려짐과 흘림을 동반하고 이것은 대상의 재현 자체를 넘어 보이지 않는 부분인 본질까지 보일 수 있게끔 만든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휑한 눈동자, 고깃덩어리처럼 허물어진 근육을 통해 감정은 더욱 증폭되고 비물질화 또는 추상성을 획득한다.

    심미주의 미술이 누리는 안락과 중독성 있는 달콤함, 헤픈 웃음을 굳이 외면하고, 진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사회에 대한 관심, 의도적으로 혹은 무관심으로 진행되는 부조리에 대해 경각심을 깨운다.

    우리 미술계를 풍요롭게 할 또 하나의 시도가 신재돈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 앎, 알지 못함

    Peter Westwood (Artist, Writer and Curator, Melbourne, Australia)

    오늘날 예술은, ‘앎’과 ‘알지 못함’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공간 안에, 지식의 한 형태로써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동시대 예술의 양상은 모더니즘의 이분법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가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숨겨진 진실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나는 안다, 하지만 나는 모른다’.

    신재돈에게 앎과 알지 못함의 자각은 분단된 한국에서 살아온 그의 삶의 경험을 통해 더욱 심화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일상적 삶에 기반하여 그는 동일한 나라가 전혀 다른 두개의 버전으로 나누어진 이분법적인 세계를 항상 인식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처럼, 신재돈의 세계관은 이 두 영토에 대한 자각을 통해 형성되었다. 하나는 그가 경험한 곳이며, 다른 하나는 상상한 곳이다. 이 두 세계는 중무장된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대립하고 있다.

    쟈크 라캉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의식의 측면과 무의식의 측면으로 분열되어 있다. 전자는 접근 가능한 마음의 영역이고, 후자는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일련의 충동과 힘이다. 의식의 자각으로부터 사라졌다고 알고 있는 무언가의 기초 위에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라고 라캉은 말했는데, 다시 말하면 그것은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이며, 무의식 혹은 무의식이 출현하는 분열된 자아의 다른 측면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그리고 무의식은 바로 그 무의식의 출현으로 인해 생겨난 빈자리를 또 다시 채우려 시도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의 심리적 완결성을 우리는 알면서 또한 동시에 알지 못한다.

    신재돈은 그의 회화 작업에서, 알면서도 동시에 알지 못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인간의 소외와 고통 그리고 고립과 같은 주제를 통해 탐구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사진 자료들을 통해 만들어 졌으나, 그것들은 오직 회화로서만 현실화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형상을 오염시키고 왜곡하는 ‘흔적 만들기(mark making)’로써의 그의 회화는 덧없고 예측 불가한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진적 재현의 한계를 넘어 형성된 그 무엇으로 등장한다. 그것들은 무의식적 타자의 느낌을 구현하고 있고 황폐함이나 상실감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의식 속에서 붙잡고 있는, 의식과 분리되거나 평행적인 영역의 무의식적 타자를 끊임없이 자각하도록 부추긴다.

    이 회화의 표면들은,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데, 고통스럽고 한시적이며 덧없는 세상을 암시하고 있다. “이 세상은 매우 의심스럽다. 일상의 미디어로부터 취한 이러한 ‘불안정한’ 이미지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형식으로서 나의 예술적 운명이며, 이 이해는 오직 은유를 통해 가능할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신재돈의 작업 속에 나타나는 형상들은 우리를 어떤 특정한 장소로 끌어 들이는데, 관람자는 그 장소가 작가가 상상으로 만든 것인지, 과거의 기억에서 나왔는지, 혹은 이 둘의 결합인지 판단하기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업들은 세상의 재현보다는 세상에 대한 해석에 더 초점이 맞추어 져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암호나 잠재의식의 코드로 형성되어 있으며, 우리가 알 수 있는 세계 밖의 결코 붙잡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환기시키고 있다.

    “나는 어린시절에, 소설은 꼭 그 작가의 마음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이면의 먼 곳에 있는 미지의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알았다.”1

    2012

    Notes: (출처)

    1. 제럴드 머레인, <보리밭>, Artamon NSW: Giramondo Publishing, 2009. p68

  • 모호한 사회에 질문 던지기… 신재돈전

    최근 호주 멜버른에서 귀국해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는 신재돈(53) 작가에게 국내 상황은 회색빛 풍경이다. 모호함의 색채다.

    “때때로 내가 현실 속에서 정말 존재하고 있는가 의심이 들 정도다. 내가 읽고 보고 있는 이 사물들, 경치들, 그리고 매일처럼 터지는 사건들이 진짜일까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한국에 와서 작업하고 있는 두어 달 동안 거의 집 안에만 있어도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일이 벌어지고 터지고, 허무맹랑한 결론으로 끝나고 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는 이 같은 모호함을 위기에 처한 인물들에서 드러내고 있다. 그림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환자, 탈북자, 한파 속 행인 등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다. 때론 ‘나꼼수’에 등장하는 인물도 있다.

    “북쪽의 김정일이 죽고 눈 내리는 평양 거리에서 북한 사람들이 울부짖었다. 추운 겨울 아침엔 정봉주라는 사람이 구속되고 겨울 날씨에 아랑곳없이 비키니 입은 여자들 사진이 떴다. 중국에서 붙잡힌 탈북자들은 강제로 되돌려보내지려고 한다.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정당들은 이름을 모두 바꾸어 달았다. 참으로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매일같이 새로운 날이 오고 새로운 일이 벌어진다.”

    작가는 이 세상 자체가 모호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통찰의 출발로 보고 있다. 견고한 명확성을 부르짖는 몸짓들의 허구를 넌즈시 드러내 보여주려 한다. 시각적 모호함으로 칼선 대립과 갈등의 전선을 무력화시키려는 듯하다.

    “어제의 담론이 일주일 후면 낡은 담론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실재하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 이것들을 아는 것일까. 정보는 전파를 떠다니다 TV화면을 통해 운좋게 나의 뇌파에 와닿거나, 인터넷의 가상광고 속에서 끊임없이 생산되고 떠돌아다닌다. 어떤 알 수 없는 공간 속에서 탄생되고 어둠 속을 부유하다 마침내 어디론지 사라지는 알 수 없는 말들, 사물들, 사건들. 이것들은 내가 만질 수 없는, 실제라고 믿기 너무나 어려운, 15인치 랩톱 사각형 화면 속에 모조리 살고 있다.”

    작가의 천착은 종국엔 역사에 머문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단지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2012년을 걸어가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실체로서 인간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무엇인가. 역사 속에서 인간들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이 역사 속에서 우리는 아직 진실을 알 수 없다. 지금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가짜일 수 있다. 가짜라고 생각했던 것이 진실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진실을 품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위대하다. 나의 작업은 바로 이 무력한 존재로서의 역사적 인간들, 사람들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여정 속에서 세상의 깊이를 가늠하고 싶다.”

    그는 설령 모호하다 할지라도 의심하고 질문하기를 멈추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예술이고 그의 작업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을 심플하고 직선적으로 한다.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을 알기에 그렇다. 얼치기 미학, 심미주의로 시간을 소진하고 싶지 않다.” 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형과 색의 과감한 구사로 이 시대를 담아내려는 모습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20일까지 갤러리 고도. (02)720-2223

    편완식 선임기자

  • 개인전 ‘모호한 시각, 모호한 질문’ (2012.3.7-20/갤러리 고도, 서울)

    모호한 시각, 모호한 질문 (ambiguous viewpoint, obscure question)

    때때로 내가 현실 속에서 정말 존재하고 있는가 의심이 든다. 내가 읽고, 보고 있는 이 사물들, 경치들, 그리고 매일처럼 터지는 사건들이 진짜일까?

    한국에 와서 작업하고 있는 이 겨울의 두어 달 동안 거의 집안에만 있어도 세상에서는 끊임없이 일이 벌어지고 터지고 추적하고 허무맹랑한 결론으로 끝나고 하는 일이 반복된다. 나는 그것들을 안다.

    북쪽의 김정일이 죽고 눈 내리는 평양 거리에서 북한 사람들이 울부짖었다. 추운 겨울 아침 정봉주 라는 사람이 구속되고 겨울 날씨에 아랑곳 없이 비키니 입은 여자들 사진이 떴다. 중국에서 붙잡힌 탈북자들이 강제로 되돌려 보내지려 한다. 두 개의 선거가 시작되는 이 새해 벽두 겨울에 보니 정당들이 모조리 이름을 바꾸어 달았다.

    참으로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매일 같이 새로운 날이 오고 새로운 일이 벌어진다. 어제의 담론이 일주일 후면 낡은 담론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실재하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 이것들을 아는 것일까? 정보들은 전파로 떠다니다 TV 화면을 통해 운 좋게 나의 뇌파에 와 닿거나, 인터넷의 가상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생산되고 떠돌아 다닌다. 어떤 알 수 없는 공간 속에서 탄생되고 어둠 속을 부유하다 마침내 어디론지 사라지는 알 수 없는 말들, 사물들, 사건들. 이것들은 내가 만질 수 없는, 실재라고 믿기 너무나 어려운 15인치 랩탑 사각형 화면 속에 모조리 살고 있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는 없다. 단지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2012년의 역사 속을 걸어가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인간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무엇인가? 역사 속에서 인간들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이 역사 속에서 우리는 아직 진실을 알 수가 없다. 지금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가짜일 수도 있다. 가짜라고 생각 했던 것이 사실 진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진실을 품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위대하다. 나의 작업은 바로 이 무력한 존재로서의 역사적 인간들, ‘사람들’에서 출발한 것이고 이 여정 속에서 세상의 깊이를 가늠하고 싶은 마음이다.

    의심은 모호하고 질문도 모호하다.

    그러나 나는 의심하고 그리고 나의 미디엄으로 단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늦게 출발한 나에게주어진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으니, 나는 이 질문을 아주 심플하고 직선적으로 하고 싶다. 얼치기 미학, 혹은 심미주의로 시간을 소진하고 싶진 않다. 질문을 던지면 무언가 반응이 올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며 나는 심히 두렵다.

    신재돈